종묘대제 제주인 ‘왕주’를 빚는 남상란 명인


왕주는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에서 빚던 가양주이자 궁중 진상주로 유명하다. 지금은 유네스코(UNESCO) 지정 세계 문화유산이자 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대제의 제주(祭酒)로 사용되고 있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제왕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제사를 모신다. 충남 논산에서 왕주를 빚는 남상란(63) 명인을 만나 왕실에 진상된 왕주의 유래를 더듬어 보았다.

명성황후 민씨 집안의 가양주에서 유래
왕주는 논산의 풍부한 물산과 명문가의 가양주 전통이 어우러진 명주이다. 논산은 땅이 넓은 곡창지대로 쌀 등의 곡식이 풍부하고 물이 맑아 집집마다 가양주를 빚었다. 또한 백제의 명장 계백이 마지막 전투를 벌인 황산벌의 유지가 살아있는 곳으로 백제인들의 얼과 망국의 한이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가미돼 신비감을 더해준다.
여기에 명성황후 친정 가양주라는 역사적 사실이 명주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남 명인의 왕주 빚기는 3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남 명인은 친정 어머니 도화희(88) 여사에게서 배웠다. 도씨도 친정 어머니(고 민재득)로부터 배웠는데 민씨가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이다. 친정이 경기 여주로 가양주를 빚어 왕실에 진상한 것을 논산으로 시집와 재현한 것이다.
예로부터 사대부 집안은 어느 곳이나 제사와 손님 대접을 위해 가양주를 빚었다. 남상란 명인도 어려서부터 집에서 어머니가 빚던 술을 보면서 자랐다. 어머니의 술 빚는 솜씨가 딸에게 전해지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일 터. “어렸을 때 외갓집에 가보면 12대문을 가진 대갓집이었는데 광에 술 단지가 떨어지지 않았어요. 소와 돼지다리는 물론 술 단지가 있었던 기억이 또렷해요. 외숙모가 부엌에서 술을 짜 마셔보라고 하기도 했지요.”
친정집도 술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친정에서는 어머니가 맨 날 술밥(고두밥)을 쪄 식히고 누룩을 섞어 술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몰래 술밥으로 직접 술을 빚기도 했어요.” 그런 남 명인이 시집와서 술을 빚게 될 줄은 몰랐다. 1967년 스물한 살에 남편(이용훈, 64)과 중매 결혼했는데 양조장집이었다. 올해 초 작고한 시아버지(고 이연하)가 아들 4형제에게 논산 4개면에 각각 양조장을 차려주었다. 남 명인은 9남매의 맏딸이자 7남매의 맏며느리로 양조장집에 시집와 술 빚는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남 명인이 본격적으로 술 빚기에 나선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이다. 국민 애용주로 즐기던 막걸리가 맥주, 소주 등의 등장과 함께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부터다. “기존 노성면 양조장과 은진 반야양조장을 거쳐 가야곡면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왕주 재현에 나섰습니다.” 현재의 민속주왕주 자리이다.

냉동여과와 저온살균으로 품질개선
왕주의 원료는 쌀과 누룩이 주원료이다. 여기에 야생국화(구절초)와 구기자, 오미자, 솔잎, 매실, 산수유, 가시오가피, 홍삼 등이 약재로 가미된다. 그래서 궁중 진상 약주로 불린다. 공정은 쌀을 씻어 술밥(고두밥)을 찌는데 뜨거울 때 누룩을 섞어 완전히 식힌다. “뜨거울 때 누룩을 섞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 잡균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친정에서부터 배운 과정입니다.” 이를 술독에 넣고 물과 엿기름을 혼합해 그늘에서 보관한다.
다음은 덧술이다. 쌀을 씻어 물기를 빼고 고두밥을 찐다. 여기에 누룩을 섞어 완전히 식힌 다음 밑술과 함께 술독에 넣는다. 이때 야생국화와 매실, 솔잎, 산수유, 오미자 등의 약재를 가루로 빻거나 절단해 첨가한다. 술독의 재료를 잘 섞고 참나무 숯과 말린 고추 3~4조각을 띄워 밀봉하는데 이물질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이를 그늘에서 100일 정도 발효시켜 용수를 박아 맑은 술을 뜬다. 이것이 궁중 진상 술이자 약주인 궁중술 왕주이다. 왕주는 3~4번 여과해야 제대로 된 왕주를 맛볼 수 있다. 술을 짜고 시간이 지나면 맑아지는데 이를 3~4번 반복해 맑은 술을 얻는 것이다. 지금은 대량 생산을 위해 발효 숙성탱크를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40~50개 전통 항아리에서 왕주 익는 향기가 진동했다.
왕주의 특징은 다양한 약재를 사용하는 약주이자 술 빚는 기술로 요약된다. 약재로 사용되는 야생국화의 경우 식욕증진과 건위, 정장, 피로회복, 청혈작용에 의한 고혈압예방 등의 효능이 알려진다. 불로초로 불리는 구기자는 정력증진과 위장·신장·간장·심장질환 효능에다 콜레스테롤 저하와 혈액순환 촉진에 의한 성인병 예방에 좋단다. 솔잎은 보혈, 강장, 진해 작용으로 중풍과 동맥경화, 당뇨병예방 기능이 전해진다.
여기서 남 명인의 약초자랑이 이어진다. “구절초는 9월 9일 중양절에 하얗게 꽃이 피면 직접 따다 말려 사용하고, 솔잎도 5월에 새순을 땁니다. 봄에 따야 향기롭고 효과도 좋답니다.” 특히 냄새 없는 누룩개발도 성공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배양누룩과 매실과즙 혼합물에 효모를 접종해 발효시키는데 누룩냄새가 90% 제거된다고 한다. 다음은 냉동여과 기술이다. “왕주를 1차 여과한 다음 영하 3~4℃에서 72시간 교반기로 돌린 후 2차 여과합니다. 그러면 왕주 특유의 맛과 향을 유지하면서 숙취와 두통이 없고 깔끔한 맛을 냅니다.” 저온살균 처리기법을 이용해 유통기한도 2년으로 연장했다.

종묘대제에 사용되는 유일한 ‘헌주’
제품은 알코올 13% 발효주인 ‘왕주’가 기본이다. 여기에 1998년 알코올 25% 증류주인 ‘불소주’를 개발한데 이어 2000년 ‘타임오브킹(알코올 40%)’을 추가했다. 타임오브킹은 양주 대응 제품으로 꿀을 넣어 품질을 고급화시켰다. 산삼주를 비롯한 가시오가피주, 복분자주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데 기본 술은 왕주이다.
유통은 우체국쇼핑과 인천공항 면세점, 할인점, 편의점, 군납 등을 통한다. 명절 선물세트로도 인기인데 1990년대 초반 유통기한을 연장한 기술로 다양한 선물세트를 개발해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왕주가 처음 나왔을 때는 인기가 좋았어요. 사람들이 공장 앞에서 밤새 줄을 길게 서 기다릴 정도였으니까요. 심지어 서울에서까지 내려와 가져갔다니까요.” 왕주를 자랑하는 남 명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왕주는 해외 시장에서도 인기를 모았다. 지난 2000년 정부의 전통식품 세계화를 위한 품평회에서 수상한 것을 계기로 일본 수출을 시작했다. 이후 미국과 홍콩 등으로 확장됐다. 최근에는 막걸리 열풍과 함께 복분자·오디·청매실을 이용한 색깔 있는 막걸리를 개발해 인기를 얻고 있다. 국산 막걸리의 열풍은 일본 열도에서 시작됐는데 현재 수출을 추진 중이다.
이런 노력으로 민속주왕주는 1997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56호인 종묘대제의 제주로 지정됐다. 남 명인이 1980년대 중반부터 왕주를 종묘대제 헌주로 공급한 것을 공식 인정받은 것이다. 종묘대제의 제수 봉행 전담자인 중요 무형문화재 이형렬 씨가 왕주를 헌주로 지정하면서 본격화됐다. 시댁이 전주이씨 집안이란 이유도 작용했다. 남편은 효령대군파 23대손으로 매년 종묘대제에 참석한다. 지금은 기능전수자인 준연(38)씨도 함께 봉행하고 있다.
1997년은 경사가 겹쳤다. 남상란 명인이 정부의 전통식품 명인 13호로 지정돼 왕주의 역사적 유래와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후 2000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공식 만찬주로 공급됐다. 2004년에는 석탑산업훈장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제는 프랜차이즈다
왕주의 명맥은 기능전수자인 둘째 아들 준연씨로 이어지고 있다. “궁중 진상주이자 종묘대제 헌주인 왕주를 영원한 가업으로 전승할 것입니다.” 준연씨는 요즘 왕주의 대중화와 수출을 위한 프랜차이즈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의 막걸리 붐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막걸리 프랜차이즈로 현장에서 효모가 살아있는 술을 빚어 어울리는 안주와 판매하면 쌀 소비촉진에도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왕주와 어울리는 안주 개발이 한창이다. 음식솜씨 좋은 남 명인은 이미 고 황혜성씨로 부터 궁중요리 교육을 이수했다. 막걸리는 풋고추 안주가 제격으로 이에 맞는 집장을 개발한 것은 물론 두부요리 등 다양하다. 막걸리 제조기술의 일본 진출도 상담중이다. 준연씨는 “일본에서 막걸리 기술전수 제휴가 들어올 만큼 관심이 높다”며 “수출은 물론 일본 현지의 공장설립도 가능하다”고 전했다.
남 명인은 요즘 왕주를 빚으면서 시어머니(임동희, 83)와 친정 어머니를 돌보느라 마음이 분주하다. “부모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청결하게 빚습니다. 명주의 명맥을 잇는다는 자부심도 강합니다. 왕주에 어울리는 안주를 개발하고 있는데 대를 이어 노력하면 세계시장에서 알아주는 술이 되겠지요?”